속기 합격수기
2인 1조 생활과 의회 속기사 비시즌의 여유
- 관리자
- 2026-05-26
의회에서 근무하는 속기사의 일상은 일 년 중 의회의 '회기 기간(시즌)'이냐, 아니면 회기가 없는 '비회기 기간(비시즌)'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그야말로 180도 갈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회 속기사의 주 업무는 구의회나 시의회 등에서 열리는 본회의나 상임위원회에 직접 참석해서,
의원들과 피감기관 공무원들이 주고받는 정책 질의와 답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록하는 일입니다.
대개 의회는 혼자서 독박을 쓰는 게 아니라 2인 1조나 팀 단위로 순번을 짜서 들어가는 '번조 방식'으로 일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 차례가 되면 노트북을 들고 회의장에 들어가서 10분에서 15분 동안 실시간으로 미친 듯이 타이핑을 하고 나오고,
시간이 다 되면 다음 순번의 동료 속기사와 자연스럽게 교대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회의장에서 탈출해 내 자리로 돌아오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방금 정신없이 쳤던 초안을 켜두고,
녹음기를 다시 들으면서 누락된 발언이나 오타를 수정하는 대조 및 교열 작업을 무한 반복하며 최종 의사록을 완성해 나갑니다.
행정사무감사나 예산안 심의가 잡혀 있는 회기 시즌이 시작되면 그야말로 매일이 전쟁터나 다름없습니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시 퇴근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하는 날이 많고,
가끔 의원들끼리 의견이 안 맞아 고성을 지르며 동시다발적으로 말싸움을 벌일 때는 도대체 누구 목소리인지
귀를 찢어가며 분리해 내야 해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게다가 우리 지역구의 세부적인 현안 사업 이름이나 생소한 조례안 명칭, 낯선 도로명 같은 것들은
회기 전에 미리 찾아보고 예습해 두지 않으면 실시간으로 들어갔을 때
손이 완전히 꼬여버리기 때문에 은근히 공부해야 할 양도 많습니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하고 장시간 긴장한 채 타이핑을 하다 보니,
시즌 중에는 퇴근하고 나서도 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이 생기거나 편두통을 달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힘든 시즌이 지나고 회기가 없는 비시즌이 찾아오면 의회 속기사의 업무 환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천국으로 변합니다.
밀려 있던 회의록들을 차분하게 마무리 짓고 나면 간단한 행정 업무 외에는 크게 터치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자리에서 개인 공부를 하거나 다른 자격증 시험을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엄청나게 많이 생깁니다.
연차를 쓸 때도 상사나 동료들 눈치 볼 필요 없이 원하는 날짜에 길게 붙여서 쓸 수 있어서
리프레시를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습니다.
이렇게 업무의 강약 조절이 확실하다는 점이 장기 근속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중요한 정책과 예산들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가장 최전선에서 직관하고,
내 손을 거쳐 탄생한 의사록이 영구 보존되는 공공 기록물로 남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힘든 시즌의 기억도 금세 잊히고 보람차다는 생각이 듭니다.